[한국의 수출영웅] 김동수 ‥ '항아리 빚던 손으로 본차이나를'
최봉학 200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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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초 한국도자기는 서울 명동 신사조빌딩에 "서울 사무소"를 냈다.
크기라야 네 평이었고 직원도 고작 여직원 한 명이었다.

규모야 말 그대로 코딱지 만했지만 1959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의 부름 으로 고향 청주의 한국도자기에 입사한 이래 꼭 10년만의 서울 입성이었다.

상대를 졸업한 후 교수가 되려는 꿈을 접고 그릇과 함께 묻혀 산 10년 세월은 정말 사금파리 위를 맨 발로 걷는 듯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생산설비라곤 장작불을 때서 굽는 벽돌가마가 고작이었고 기술은 적당히 구워낸 초벌구이 수준이었다.

게다가 회사는 2백여장의 사채카드를 가진 빚 투성이로 매출의 40%가 이자로 나 가는 판이었다.

그런데도 신용 하나를 밑천으로 70여명의 직원과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는데 문 제는 품질이었다.

"제품이 이게 뭐요?"

그릇도매상들은 결제를 해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이야기를 툭툭 뱉아냈다.

제품을 깔보는 말투가 비수로 가슴을 에는 것 같았다.

"섭씨 1천2백도를 낼 수 있는 현대식 소성로 하나만이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지만 사채도 못 갚는 터에 현대식 가마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식구가 다니던 청주서문교회의 헌당식이 있던 날,선교사 엘마 길보른이 캐 나다에서 보내온 기독실업인 지원자금 2만달러를 빌려준 것이다.

나는 이 자금으로 선진국의 최신식 소성로 4기를 도입했다.

그리고 세계적인 도자기회사 로얄 덜톤(Royal Doulton) 그룹 산하 존슨 맷시 회사와 "황실장미" 전사지(轉寫紙,인쇄 화지) 공급계약을 맺었다.

"황실장미"는 1963년부터 한국도자기가 내놓은 브랜드였는데 품질이 좋지 않아 인지도가 낮았다.

그런데 최신식 설비에 최고급 전사지로 처리한 신제품 황실장미 홈세트가 출시 되자 그야말로 제품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지인의 도움으로 워커힐호텔을 비롯한 각급 호텔에 납품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출을 하자!"

내수판매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나는 수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제학을 공부했던 나는 무역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인구가 적은 우리나라 의 시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1968년 어느 날,무역대행을 맡고 있는 한국교역에서 연락이 왔다.

태국의 바이어가 샘플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의 최고급품을 보여주며 계약을 유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첫 계약은 쉽지 않았다.

기독교 신자로서 술을 먹으면 안 되지만 술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0만 달러의 수출고를 기록하게 되었고,그 해에 총 수출 액이 45만달러에 이르렀다.

"황실장미"가 성공을 거두자 후발업체들이 이를 모방한 제품을 가지고 시장에 뛰어들면서 과당경쟁이 예상되었다.

기술개발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에 1971년 유엔개발기구(UNDP)의 경 제시찰단으로 호주 시드디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한 백화점에서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물건을 발견했다.

자줏빛 시트 위에 투명하면서도 부드러운 유백색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우아한 자기 하나.

품위 있으면서도 만지면 날아갈 듯한 신비한 질량감이 내 혼을 빼놓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오,본 차이나(Bone China)!"

가격을 물어보았다.

종업원은 무려 20달러라고 답했다.

"커피잔 하나에 20달러라니 우리 제품의 20배가 아닌가?"

부족한 여행경비를 쪼개고 쪼개어 그 커피세트를 샀다.

호텔로 돌아와 그 커피세트를 만져보고,멀리 놓아보고,맛보고 그렇게 밤을 하얗 게 샜다.

"바로 저거다. 본 차이나를 만들어야 한다."

서울에 돌아와 여러 경로를 통해 본 차이나의 제조 방법을 알게 되었다.

잘 정제된 젖소뼈 50%,점토 25%,도석 25%를 원료로 하여 철분과 공기를 완전히 제거한,그야말로 "꿈의 도자기"였다.

당시 생산지는 영국,독일,일본뿐.일본에서는 요업의 명문 나고야 공업연구소에 서 만들고 있었다.

황급히 일본으로 날아갔다.

"하하! 한국에서 이것을 만들겠다구요? 우리는 영국에서 기술을 도입한지 30년 만에 이를 성공시켰는데 기술도 없는 한국에서 어떻게 성공하겠어요?"

다행히 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 제조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이번에는 영국으로 날아가 영국 도자기의 2대 명가(名家)인 로얄 덜톤과 웨지우 드를 방문했다.

그런데 이들은 바늘구멍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기술이전에 회의적이었다.

개발비로 40만 달러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973년 말,청와대의 전폭적 지원과 덜톤 그룹 산하 크레스콘사의 기술제공으로 한국도자기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본 차이나 개발에 성공했다.

본 차이나의 개발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한국도자기는 1976년12월 충북 청주 시 송정동에 연건평 3천2백10평의 수출 제1공장을 준공했다.

이 무렵,나는 부지런히 해외를 돌아다니며 판로를 개척하였다.

그렇지만 영국,독일,일본 제품이 강세를 이루고 있어 일단 "메이드 인 코리아" 라고 하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나마 애써 따온 물량도 OEM(주문자 상표부착생산)방식이었고 이마저 많은 물량이 아니었다.

1968년에 10만 달러의 수출액을 기록한 이래로 1976년 86만 달러로 강산이 한 번 변한 10년 동안에 받은 성적표는 초란한 것이었다.

기술개발에 의한 신상품 출시 없이는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통 감하여 1977년 일본의 상고(春日) 차이나와 기술 및 판매제휴를 맺었고,이어서 노리다께와도 기술협력을 맺었다.

상고 차이나와 제휴를 맺은 첫 해,자기들이 미국에 수출하는 물량의 10%를 우리 에게서 가져갔다.

이 비율은 해마다 늘어나 1982년에 가서는 90%를 우리에게서 가져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때,우리 제품을 세계시장에 직접 팔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한국도자기는 영국 크레스콘사의 와일드블러드씨를 기술고문으로 초빙했다.

그의 기술적 조언과 본사 기술진의 노력 끝에 마침내 1977년11월 미국 식품의약 청(FDA)으로부터 "무공해 위생식기"라는 판정을 받아냈다.

이 무렵,우리 회사는 수출 1백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1979년에는 5백만 달러 어 치를 수출했다.

그러나 애틀란타 국제도자기쇼에서 당한 참패를 거울 삼아 기술개발에 역점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전사적으로 세계일류화 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1984년1월,다시 미국 애틀랜타의 "국제도자기 쇼"에 참가했다.

다소 긴장되긴 했으나 이번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결과는 4백20개사 참가 제품 중 품평순위 20위.세계 최고는 아니었지만 선두권 에 진입한 것이다.

이후,마케팅에 열중했다.

그런데 행사 마감결과 우리의 계약 실적이 세계 1위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6년 전에 당한 치욕과 서러움을 일시에 만회되는 순간이었다.

세계적인 권위지 시카고 트리뷴은 우리를 "도자기의 여왕"으로 칭하며 대서특필 했다.

이 기세를 몰아 그 해에는 드디어 1천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거두었다.

이제는 도자기의 본고장인 영국의 로열덜튼과 독일의 빌레로이앤보흐에 우리 제 품을 수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9년부터는 교황청 식기 납품업체로 선정되었으며 노벨상 만찬장 식기도 공급 한 바 있다.

최근에는 초고가 브랜드인 "프라우나"를 개발해 고가품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우리 한국도자기는 모두가 어려웠던 IMF 경제위기 상황에 무차입경영을 실현,언 론에 집중 조명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역시 사업 초창기에 부채에 너무 시달렸던 탓에 "작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단 단한 기업"을 만들겠다는 의지 때문에 가능했다.

이번에는 한국도자기의 임직원 모두가 2005년에 세계 1위 기업이 되겠다는 목표 를 갖고 뛰고 있다.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이것을 반드시 달성한다면 우리 한국도자기는 다이아몬드 처럼 영원히 빛나는 기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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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수 회장 약력 ]
36년 충북 청주시 남주동 출생 59년 연세대 상경대 경제학과 졸업 59년 한국도자기(주) 입사 68년 대한도자기공업협동조합 이사 84년 한도통상(주) 회장 84년 수안보파크호텔(주) 회장 90년 한국도자기(주) 회장 91년 경찰청 초대 경찰위원 91년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 회장

자료출처:한국경제